시베리아 횡단열차

새벽부터 룸메이트가 깨지 않게 조용히 짐을 싸고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렀다. 자는 직원을 깨우고 체크아웃한 다음 서둘러 버스 타는 곳으로 향하는데 역시 짐 무게를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유럽에 도착하면 반드시 버릴 거라는 생각에 추울지 모르니 좀 더 들고 가기로 위안한다. 버스 안은 역시 아침부터 만원이다. 가방을 한쪽 구석에 놓고 만원 버스에 이리저리 치이니 이내 기차역이다.

기차역 안으로 들어가 엑스레이 검사 게이트를 지나가는데 직원이 부른다. 보조 가방을 꺼내보라고 총을 가진 거 아니냐고 한다. 난 깜짝 놀라 아니라고 손을 휘저었다. 경비직원이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는데 내 가방 안에 여지없이 총 모양이 나와 있는 것이다. 가방을 열라는 경비직원 말에 서둘러 가방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가방안에는 액션캠과 물건들의 배치가 교묘하게 총 모양으로 보이게 되어있었다. 경비직원은 웃으면서 됐다고 들어가라고 한다. 총은 당연히 없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긴장했다.

난 가방을 맡기기 위해 직원에서 손짓 몸짓으로 물어보니 오른쪽으로 쭉 가면 있단다. 짐을 120루블에 맡기고 나와 물을 사고 e티켓을 종이티켓으로 바꾸니 시간은 10시 반이 되어간다. 승차권 교환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괜히 짐을 맡긴듯한 느낌이다. 짐을 찾고 플랫폼에 내려 가방에 걸터앉아 기차를 기다린다. 관광객들은 역 안의 모스크바까지 킬로수가 표시된 곳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나도 관광객이니 사진 찍어야지.

기차가 들어오고 드디어 기차 여행이 시작된다. 기차는 침대칸으로만 되어있는데 키 큰 사람은 1층에 예약해야 할 듯 싶다. 침대 길이가 좀 짧아 다리가 다 안 펴지고 이층은 앉지도 못한다. 상황파악을 위해 가만히 앉아있으니 누군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다. 한국이라고 하니 자기는 우즈베키스탄이라고 하는데 역시 영어는 못하고 번역기로 대화가 오고 갔다. 우즈베키스탄인은 역마다 지나가는 사복경찰이나 정복 경찰한테 계속 여권 검사를 당한다. 여기서 일하고 이제 돌아가려고 이 기차를 탔다는데 다시 돌아올까 싶다.

기차 안에서의 생활은 없다. 기차는 1번 기차가 가장 좋고 99번 열차가 가장 안 좋다고 한다. 싼 걸로 타다 보니 여긴 설국열차의 꼬리 칸 느낌이 물씬 난다. 누군 해리포터의 침대칸 열차가 생각난다는데 난 끼니마다 양갱이를 먹어야 할거 같은 기분이다. 첫날이 지나면서 더 이상 풍경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느낌도 없다. 그냥 빨리 기차가 도착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열차의 낭만을 생각하고 탔다면 나한테는 그런 거 없었다. 그냥 심심하고 지루할 뿐. 불편한 거는 참을 수 있지만 지루함은 오래간다. 지루함을 달래주듯 러시아인 유라라는 아줌마가 아침부터 주위 아줌마랑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술을 권하고 나한테도 권하고 난 괜찮다고 했다. 유라 아줌마는 내릴 때까지 술을 마셨는데 내리면서 악수하고 러시아말로 뭐라 한다. 아마 여행 잘하라고 하는 듯 내 맘대로 해석해본다.

기차 안에 누워 졸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시간은 그 안에서 기차만큼 빠르게 지나간다. 기차가 출발했을 때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고 조금 지나가니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추워지기 시작하고 멀리 설산이 보인다. 그러다가 우박이 내리기 시작하고 비가 오고 다시 햇볕이 뜨겁게 내린다. 기차 타는 시간 동안 계절의 변화를 느낄 정도로 다이나믹하게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약 60시간이 지나니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차장이 내 표를 다시 갖다 주면서 돈 받고 빌려줬던 침대 시트를 가져간다.

드디어 도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