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

 

배낭을 멘 순간부터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물건들을 넣었는데 후회가 밀려온다. 이 정도쯤이야 라고 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다시금 내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간신히 무거운 배낭을 공항버스에 밀어 넣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여행을 간다는 것은 언제나 설렌다. 창밖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공항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티켓팅을 하는데 직원분이 편도라서 입국심사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 괜찮냐고 한다. 어차피 두 시간 비행인데 난 괜찮다고 하고 탑승했다.

드디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편도 비행기 표 때문에 공항에서 제재가 있을까 싶었지만 온 목적만 물어보고 바로 통과 순조롭게 게이트를 나왔다. 나오자마자 통신사를 찾아가 3기가에 300루블 유심을 사고 바로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 호스텔 가는 곳을 물어봤는데 거기까지 가는 버스는 없다고 한다. 일단 가서 뭐든지 해결하자는 생각에 정보를 안 알아온 것이 나의 불찰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이름 정도는 알고 오는 것인데 호스텔이 외곽에 있는 바람에 인포메이션 직원도 그쪽으로 가는 차편을 모른다고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근처라도 가는 것을 알려달라고 해서 버스 107번을 타러 갔다.

공항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가는 도중 택시 호객하는 사람이 붙어 2,500루블을 부른다. 러시아어도 모르는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끊임없이 하는데 분위기상 비싸게 부르는 거 같아 난 너무 비싸다고 버스 탄다고 하니까 바로 1,500루블로 바뀐다. 난 그것도 비싸다고 하고 계속 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택시기사와 버스 기사가 러시아어로 뭐라 뭐라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더니 내가 보여준 주소를 못 간다고 버스 기사가 안 태워준다. 난 170번 맞지 않으냐고 탄다고 하고 버스 기사는 자리 없다고 하고 옆에서 택시기사는 계속 나에게 1,000루블에 가자고 하고 있다. 난 알았다고 하고 다음 버스 시간을 확인하려고 다시 인포메이션 센터로 걸어가는데 버스 기사가 택시기사가 멀어지는 걸 보고 다시 부른다. 타라고, 잉! 뭐지 하면서 난 얼른 탔다. 어차피 근처는 간다고 했으니까 가서 다시 찾아보자는 생각에 일단 공항을 벗어나는 것도 다행이다 싶었다. 뒤에서 택시기사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거리는 꽤 멀어서 택시비가 비싼 이유를 알겠다. 호스텔에 전화 했을때도 택시비를 1,300불 정도라고 했으니까. 버스 안에서 한국어를 하는 동양인(고려인인지 조선족인지 북한사람인지 모르겠다)을 만나 옆에서 어떻게 가라고 친절히 알려주고 내려서 택시 타는데 흥정까지 해주었다. 택시는 미터기가 없어서 부르는 게 값이다. 택시를 타고 호스텔까지 무사히 왔다. 생각보다 상당히 빨리 왔다.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와서 오늘은 푹 쉴 수가 있겠다. 침대 자리를 배정받고 옆 침대 사람하고도 인사를 했다.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니 러시아 사람이라고 한다. 침대 옆 조그만 캐비닛을 보면서 내 짐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짐 한 번 보고 캐비닛 한번 보고 에고 그냥 침대 옆에 배낭을 던져 놓는다. 난 내일 여행을 위해 잘 때까지 인터넷으로 유명 관광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호스텔은 친절하고 영어도 어느 정도 통하고 시설도 좋다. 동양인은 나 하나밖에 없는듯하고 같이 있는 룸메이트는 다 러시아인들이다. 러시아인들도 영어를 좀 해서 대화를 하는 데 큰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꽤 방이 조용하다. 러시아인들은 장기투숙객들이 많은데 다들 여기서 일을 하느라 출퇴근을 한다. 여기가 싸서 여기서 지낸다고 하는데 낯설었다. 일어나서 씻고 호스트를 찾아 버스 타고 시내 나가는 것을 물어봤다. 역시 이쁜 러시아 누나가 어떻게 가는지 버스비는 얼마인지 동네 이름까지 알려줘서 난 천천히 시내를 돌아볼 생각으로 느지막이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는 뒤로 타서 앞으로 내리면서 돈을 내는데 우리나라 시내버스를 그대로 수입해서 운영하기 때문에 타는 순간 한국 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벨까지 똑같다. 창문 밖을 보면 이국적이지만 버스 안은 한국적인 그런 오묘한 40분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이 나온다. 내리기 위해 20루블을 준비해 버스 기사 앞 동전통에 넣고 내리면 된다. 버스요금은 정말 싸다. 거리당 요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탈 때마다 낸다.

구글맵을 켜고 즐겨찾기 해놓은 곳을 둘러보기 위해 루트를 짜본다. 거의 다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여서 또 걷다 보면 공원과 벤치가 많아서 충분히 쉬면서 다닐 수 있다. 걷다 보면 유모차를 끌고 온 주부들이 꽤 많은데 산책을 정말 많이 하는 거 같다.

아침 공기가 싸늘하다.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도 들린다. 눈을 감고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아 날씨를 검색해 보는데 종일 비가 온단다. 아 여행자인데 비가 오면 참 난감하다 나가야 하는지 하루 땡땡이를 쳐야 되는지. 지금 오전 8시 반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한다. 한국에서도 일기예보는 맨날 틀리니까 여기도 좀 있다가 그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ㅎㅎ. 나가고 싶어도 비바람이 너무 거칠어 우산도 없는데 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아침인데도 밤처럼 어둡다. 안개가 바로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끼어있고 이슬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룸메이트도 안 나가서 요즘 날씨를 물어보니 4월, 5월은 자주 이런다고 한다. 하루종일 낮도 밤도 아닌 시간관념도 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오늘 하루 쉬고 낼 다시 나가리라.

어제는 종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3m도 제대로 안 보인다. 전망대를 가야 되는데 이래서 뭐가 보이려나 싶다. 그래도 이틀을 연속 쉴 수는 없다. 주섬주섬 준비하고 버스를 타고 신한촌기념비를 찾아간다. 생소한 곳에 내려야 하기 때문에 바짝 긴장하며 안내 방송에 정거장 이름이 나오길 기다린다. 20분 정도 지나 안내방송이 나오고 나는 재빨리 20루블을 내고 내린다. 구글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거리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중간중간 재래시장에서 과일들을 사는 아줌마들도 보이고 빵을 사 가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정도 걸었다 싶었을 때 난 거리 한쪽에 철망이 쳐진 기념비을 발견했다. 난 최대한 철망에 바짝 다가가 매달리다시피 안을 구경하고 있는데 안에 사람이 나오더니 철망을 열어준다. 살짝 당황했지만 난 들어가 묵념을 하고 기념비도 읽고 사진도 찍고 하는데 관리인분이 따라 들어오라고 하신다. 작은 방에 따라 들어가니 거기 방명록을 쓰는 공책이 있다. 난 작게나마 방명록을 남기고 다시 밖으로 나와 묵념한 뒤에 나오려 하는데 이런 철문이 안 열린다. 이리저리 움직여봐도 꿈적도 안 하던 철문을 관리인이 나와 웃으면서 반대편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뭐지 아 창피하다. 고정된 문을 열고 있었다니 멋쩍은 웃음만 나온다. 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바로 다음 목적지로 걸어갔다.

대부분이 근처에 있으므로 천천히 걸어 다니면 된다. 벤치도 많아서 쉬기도 좋고 힘들면 앉아서 쉬고 또 걷고 먹고 구경하고 이게 전부다. 과자를 꼭 껴안은 꼬마를 따라 길을 내려가니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집터였다는 곳이 나온다. 지금은 상가로 변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난 그 상가에 들어가서 물이라도 사본다. 이렇게 된 것을 누구를 탓하겠는가 잘 기리고 보전할 정부를 뽑지 않은 우리들의 잘못이지 싶다.

오후가 되면 안개가 걷힐 거라는 희망으로 전망대에 갔다. 하지만 역시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단체 관광객들도 올라오자마자 내려간다. 그들을 따라 내려와 길가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따뜻한 스프를 시켰다. 따뜻한 정도가 아닌 뜨거운 스프가 나왔지만, 오늘같이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뜨거운 국물이 온몸을 녹여준다. 스프와 고기를 간단하게 먹고 버스 타는 곳으로 간다. 오늘은 종일 안개만 보다 오는 거 같다.

아침부터 햇살이 강하게 내리치고 있다. 따가워 보이는 햇살이 어제의 안개에는 왜 졌는지 아쉽다. 썬크림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나가본다.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올라야 하는 계단이 오늘은 유난히 많게 느껴진다. 다리도 천근만근으로 어제 언덕을 오른 후유증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에 타니 사람들로 가득하다. 난 왜 러시아워를 피해 늦게 나왔는지 이해가 안 갔다. 여기 와서 느끼는 거지만 시간대를 다르게 해서 타봐도 버스는 항상 만원이다. 언제 타야 여유롭게 타는지 모르겠다. 더 살아봐야 되는 것인지 그래도 오늘은 중간에 내리니까 좀만 참으면 된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중국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오늘은 왠지 사람들과 함께할 예정인가보다. 중국 관광객 틈에서 어제와 같은 장소를 찍는다. 환하게 보이는 전망도 시원하게 찍는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사진을 찍고 중국인들이 사진 찍어달래서 찍어주고 나도 관광객 속에 들어가 버렸다. 아 진짜 저 속에 들어가서 편하게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긴 자유여행이 너무 불편하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들이 부럽다.

전망대를 뒤로하고 케이블카 밑 계단으로 내려간다. 낡은 계단과 기둥마다 있는 그라피티들 러시아어들이라서 그런지 영어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그라피티 맞춤 언어처럼. 계단 끝에는 오래된 성당이 있다. 성당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들어가는 길은 어딘지 몰라 못 들어갔다. 성당 마당 앞 나무 아래 벤치에 할아버지가 주무신다. 너무 편하게 보여서 방해되고 싶지 않아 바로 버스 타고 등대를 보러 가기로 한다. 성당 바로 옆 정거장에서 62번 버스를 기다리는데 15분이 지나도 안 온다. 그래 12시까지만 기다리고 안 오면 다른 스케줄로 할 것을 맘먹는다. 12시! 역시 안온다. 정거장 비둘기들도 물만 튀기니 다른 곳으로 가나보다. 나도 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한 블럭 정도 갔을 때 옆으로 62번 버스가 지나간다. 아 여기서 버스가 가긴 가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좀만 기다릴걸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박물관에 도착해 들어가니 누가 날 막는다. 영어 할 줄 아느냐고 하더니 입장료 사야 된단다. 역시 돈을 내야 되는 거였어! 아침에 쓸려고 꼬깃꼬깃 넣어둔 200루블을 어찌 알았는지 200루블 내란다. 표를 사고 들어가는데 또 다른 아줌마가 막는다. 표를 끊어야 한다고 한쪽을 잘라간다. 내가 너무 막무가내였나보다 버스를 너무 오래 기다려서 더위를 먹었나. 호랑이가 반겨주는 곳을 향해 들어가 3층까지 중앙아시아부터 시대별 러시아까지 유물들이 있다. 관람객 없이 혼자서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도 처음이다. 영어는 1층만 있고 2~3층은 러시아어들뿐이다. 여긴 관광객들에 대한 배려따위는 없다. 알고 싶으면 러시아어를 배우라는 건가. 실상은 이제 막 블라디보스토크 주정부에서 관광지를 만들어 가는 중이라고 한다.

밖으로 나와 면도기를 사러 백화점으로 갔다. 백화점에서 빵 하며 밥이며 사고 면도기를 사기 위해 찾았지만 없다. 점원한테 물어보니 데리고 간 곳이 여성 면도기 파는 곳이다. 이건 여성용이라고 남성용 찾는다고 하니 없단다. 여긴 백화점 지하 마트인데 없다니 심지어 여기 물건들은 다른 마트보다 비싸다.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없다고 하니 허무했지만 그래도 밥과 따뜻한 바게트랑 빵을 샀다. 여행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없다고 아쉬워하면 안 된다. 다른 곳에 있겠지 하고 그때 사면 된다.

이제 진짜 등대 보러 버스 타러 가야 한다. 백화점 오른쪽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애증의 62번 정거장이 나온다. 근데 가기 바로 직전에 62번이 가고 있다. 내 옆을 지나서, 진짜 오늘은 저 차를 못 타는 것인지 하지만 바로 뒤로 63번이 오고 있다. 길이 막히는 것이 이럴 때 좋은 점도 있구나 싶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 종점에 내려 버스 기사 할아버지한테 등대 가는 길을 물어본다. 러시아어로 친절하게 알려주시는데 다 못 알아듣고 손짓 하나 알아들었다. 난 꾸벅 인사하고 고맙다고 하니 웃으면서 끄덕끄덕하신다. 서로 못 알아들어도 고마움을 표시하는 건 다 안다.

22분 정도 길을 따라 걸어가면 언덕 위해 시원한 바다가 보이고 저 멀리 등대가 보인다. 손을 벌려보니 바람이 한껏 들어온다. 내가 여기서 타이타닉을 하다니 햇살이 넘 따가와 바람이 고맙다. 언덕에서 사진도 찍고 등대 가까이 걸어가니 가족들이 선탠도 하고 바비큐도하고 5~6대 정도 차들 사이로 이 뜨거운 햇살을 즐기고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등대를 향해 계속 걸어가는데 바람도 점점 심해지고 등대까지의 길도 중간에 끊겨있다. 아마도 썰물 때 등대까지 갈 수 있나 보다. 그래서인지 관광객들이 하나도 없고 여기저기 연인들만 보인다. 낯선 이방인이 와서 여기저기 사진 찍고 비디오도 찍으니 신기한지 다들 쳐다본다. 걱정 말아요 그대들 금방 갑니다. 등대 가는 길 중간 작은 자갈 해변에 앉아 빵을 먹으면서 지친 다리를 쉰다. 깨끗한 바닷물이 너무 시원해 보인다. 바닷물만 아니면 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다시 오던 길을 걷다 보니 이건 계속 오르막길이다. 어쩐지 올 때 아주 쉽게 왔다 싶더니 올라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니 아까 찍은 언덕에서 또 사진을 찍는다. 정류장에 오니 62번이 쉬고 있다. 역시 종점이 좋긴 좋구나. 잠시 기다리니 버스에 탈 수 있어서 시내로 돌아오니 숙소 가는 버스가 또 기다리고 있다.

오늘 저녁은 힘든 여정으로 인해 숙소에서 팔도 도시락라면과 밥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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